2012년 개봉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단순한 조폭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1980년대와 90년대를 관통하며 권력과 범죄가 손을 잡고 번성하던 시대의 민낯을 해부한다. 영화 속 주인공은 윤리적 기준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를 비난하기보다 동정하게 되는 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무게 때문이다. 《범죄와의 전쟁》은 정치·검찰·언론·조직폭력배가 얽혀 있는 부패 구조를 날카롭게 풍자하면서도, 인간적인 위트와 현실적인 묘사로 시대극을 뛰어넘는 사회 드라마를 완성한다.
줄거리, 주요 인물 소개
1982년 부산, 세관 공무원 최익현은 밀수 사건에 연루되며 공직에서 퇴출 위기에 처한다. 위기 속에서 그는 조폭 두목 최형배와의 인연을 계기로 범죄 세계에 발을 들이며 정·관계의 인맥을 활용해 권력의 그늘 아래 성장해간다. 하지만 국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그의 입지는 흔들리고, 결국 모든 관계망에서 버림받게 된다. 이 영화는 한 남자의 흥망성쇠를 통해 1980~90년대 한국 사회의 어두운 권력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최익현 (최민식 분)
말재주와 처세로 살아남는 세관 공무원 출신 인물. 위기 상황에서 조폭과 정계 인맥을 이용해 권력의 주변부로 진입하지만,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하는 인물이다.
최형배 (하정우 분)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이자 전략가. 검찰 및 정계와의 유착을 통해 세를 확장하며, 최익현과는 상호 이용하는 관계를 맺는다. 냉정하고 계산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던 비루한 한 남자의 시대
《범죄와의 전쟁》의 주인공 최익현은 한마디로 ‘비열하지만 살아남는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능력도, 조직을 이끄는 카리스마도 없다. 다만, ‘붙는 능력’, 즉 상황에 맞게 표정을 바꾸고 말발로 사람을 설득하는 재주가 탁월하다. 영화는 그가 세관 공무원 시절 밀수를 하다가 위기에 몰리는 장면에서 시작되며, 이내 조폭과의 친분을 계기로 사회의 비선 권력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최익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강한 조폭’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의 생존 방식은 그 누구보다 현실적이다. 1980년대 대한민국은 민주화 운동과 군부정권의 타협, 경제성장과 부패가 혼재한 혼란의 시기였다. 조직폭력은 도시개발과 유흥업계, 정관계 로비 속에서 뿌리내리고 있었고, 실제로 공권력과 야합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영화는 그 배경을 단순한 시각효과나 복고풍의 정서로 활용하지 않고, 구조적인 현실로 접근한다. 주인공의 언행 하나하나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존 전략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악인을 연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틀린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인식조차 없다. 그것은 시대가 용인한 방식이며, 심지어 장려받던 생존술이었다. 우리가 그를 미워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 속에서 우리 사회의 일면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서사는 그래서 과거의 이야기인 동시에,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권력과 범죄의 공생, 그 중간지대에서 생존한 자
영화의 핵심은 단순한 범죄와 폭력의 묘사에 있지 않다. 오히려 《범죄와의 전쟁》은 권력과 범죄의 유착, 그 속에서 태어난 중간자들의 생존을 날카롭게 들여다본다. 최익현은 조폭과 정치권, 검찰 사이를 오가며 그 누구보다 치밀하게 권력을 좇는다. 그의 무기는 주먹이 아닌 말발, 인맥, 처세술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대사는 그의 인생 철학이자, 이 영화가 관통하는 시대의 키워드다. 이 명대사는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실제로 수많은 한국인들이 체감했던 현실의 핵심이기도 하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얽힌 인맥사회 속에서 법보다 인간관계가 우선했던 구조. 그리고 그 구조를 교묘히 이용한 인물들이 오히려 생존하고 성장했던 시대. 영화는 최익현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 모순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는 범죄자이지만 체제의 희생자이기도 하고, 기회주의자이지만 누구보다 체제에 충실한 인물이다. 흥미로운 점은, 최익현이 주변 인물들에게는 미움받지만, 결국 중요한 순간마다 그 능력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권력자들은 도덕성보다는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민다. 이것이 바로 영화가 보여주는 ‘선택된 타락’의 메커니즘이다. 조직폭력배 최형배 역시 단순한 폭력적 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계획적으로 검찰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필요에 따라 정계를 움직이기도 한다. 즉, 이 영화의 인물들은 ‘범죄자’이기 이전에 ‘현실을 파악한 전략가’다. 그래서 《범죄와의 전쟁》은 조폭 영화의 껍데기를 빌려, 사실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던지기보다는, 풍자와 리얼리즘을 적절히 섞어 더욱 날카롭고 현실적으로 표현해낸다.
우리는 과연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영화의 말미, 최익현은 모든 네트워크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그토록 애써 만든 인맥은 정권이 바뀌는 순간 무너지고, 자신을 띄워줬던 권력은 더 이상 그를 보호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비단 영화 속 허구가 아니다. 실제로 수많은 현실 속 권력자들과 중간 관리자들이 정권 교체, 구조 변화 속에서 몰락을 경험해왔다. 그리고 그런 몰락은 때로는 정당하게, 때로는 너무 허망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몰락조차 하나의 시대극처럼 냉소적으로 그려낸다. 최익현의 인생은 실패처럼 보이지만, 그는 실제로 한 시대를 대표하며 살아낸 인물이다. 그의 존재는 그 시대의 부끄러운 민낯이기도 하고, 동시에 생존을 위한 인간의 적나라한 본능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비난하면서도 이해하고, 연민을 느끼면서도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당신이 그 시대에 살았다면, 과연 다르게 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비단 과거의 인물들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우리 역시 윤리와 생존, 원칙과 기회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하고 있다. 《범죄와의 전쟁》은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지만, 그 구조와 심리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단지 조폭이나 비리 공무원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우리 모두가 직면한 ‘선택의 문제’이며,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범죄와의 전쟁》은 단순한 느와르가 아닌, 시대에 대한 집요한 고백서이자, ‘나쁜 놈들이 주인공인 시대’에 대한 가장 통렬한 반영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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